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P380
- "하느님께서 그 신의 영혼을 축복해주시기를!" 조르바가 하늘을 향해 팔을 벌리면서 말했다. "그 신은 상당히 고통스러워했고 힘들어했죠. 그는 정말 위대한 순교자죠. 대장, 내 말을 좀 들어보슈. 내가 뭘 좀 압니다. 대장은 책이 하는 말을 듣지만 그런 책을 쓰는 놈들이 누군지 좀 생각해보슈! 선생들이죠! 퉤! 선생들이 여자에 대해 뭘 안단 말요? 쥐뿔도 모르죠!" "이봐요, 조르바! 당신이 직접 쓰지 그래요? 당신이 알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신비에 대해서 왜 이야기해주지 않는 거죠?" "왜냐고요? 왜냐고 묻는 거요?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신비스러운 일을 몸소 다 겪어봤지만 시간이 없수다. 한번은 이 세상을, 다른 때는 여자를, 또 언젠가는 산투리를 직접 겪어봤지만 그런 허튼소리를 쓰기 위해 펜대를 잡을 시간은 없수다. 그런 시간을 낼 수 있는 작자들은 그런 신비를 겪지 못하고요. 알아듣겠수?"
- P393
- "한때는 이놈은 터키 놈, 저놈은 불가리아 놈, 또 이놈은 그리스 놈 하고 구분했었죠. 대장, 난 조국을 위해서라면 대장이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못된 짓을 저질렀다우. 멱을 따고,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고, 여자들을 강간하고, 온 가족을 몰살하고 ... 왜냐고요? 그건 그들이 불가리아 놈들이고 터키 놈들이었으니까죠. 난 자주 '이 악당 놈아, 나가 뒈져버려라! 이 바보 얼간아, 나가 뒈져버리라고!' 하고 나 자신에게 말하면서 저주를 퍼부었죠. 하지만 대장, 이제는 나도 생각을 좀 하고 사람을 보죠. 그리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이고 저 사람은 나쁜 놈이다. 불가리아인인가 그리스인인가 하는게 문젭니까? 이제 내게는 다 똑같아요. 이제는 이 사람은 좋은 사람인가 아닌가만 묻죠. 그리고 정말이지 나이를 먹을수록, 밥을 더 많이 먹을수록, 난 점점 더 아무것도 묻지 않게 됩니다. 보세요, 좋은 놈, 나쁜 놈이란 구분도 잘 맞질 않아요. 난 모든 사람이 불쌍할 뿐이예요. 사람을 보면, 비록 내가 잘 자고 마음에 아무런 시름이 없어도,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아요. 누구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두려워하고, 그리고 자신만의 하느님과 악마를 모시다가 뒈지면 땅에 쭉 뻗고 누울 거고, 그러면 구더기들이 그 살들을 파먹을 거고 ... 아, 불쌍한 인생! 우리는 모두 형제들이에요. 구더기 밥인 고깃덩어리라고요!"
- P445
- 마을 입구에서 아나그노스티스 영감을 만났다. 그는 지팡이에 기대앉아 봄철 꽃 위를 날아다니는 노란 나비들을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늘그막에 밭도, 여자도, 자식들도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게 되어 이 세계를 살펴볼 시간이 생긴 것이다. 땅 위에 드리워진 내 그림자를 본 그가 머리를 들었다.
- P470
- 뜨거운 남풍이 이집트 너머에서 불어와 야채와 과일, 그리고 크레타의 가슴을 가득 채워주고 있었다. 나는 이마에서부터 입술을 거쳐 목으로 흘러내리는 그 바람을 받아들였다. 나의 뇌가 마치 열매처럼 껍질이 깨지는 소리를 내며 부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아니 자고 싶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없었다. 그저 이 뜨거운 밤에, 내 내면에서 무언가가, 누군가가 성숙해가고 있음을 느꼈을 뿐이다. 나는 내가 변하고 있다는 이 놀라운 기적을 두 눈으로 똑바로 지켜보며 생생하게 경험했다. 항상 우리들 가슴속 저 밑바닥 가장 어두운 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지금 이 순간 내 눈 앞에 적나라하고도 분명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바닷가에 웅크리고 앉아 이 기적을 지켜보았다. 별들이 흐려지고 하늘이 밝아왔다. 여명 위로 뾰족한 석필로 그린듯한 산과 나무와 갈매기 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날이 밝고 있었다.
- P473
- "새로운 길, 새로운 계획. 난 지나간 일 따위는 생각하지 않아요. 미래의 일도 신경 쓰지 않지요. 지금, 바로 이 순간, 바로 그것만 신경 씁니다. 난 스스로 이렇게 묻죠. '조르바,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게냐? 잔다. 그럼 잘 자라! 조르바, 넌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일한다. 그럼 열심히 일해라! 조르바, 지금 뭘 하고 있는 거냐? 여자를 껴안고 있다. 그럼 그 여자를 꼭 껴안아라! 그리고 모든 걸 다 잊어버려라, 이 세상에는 그녀와 너 이외엔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나게 즐겨라!'" 그는 잠깐 멈추었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부불리나 생전에 그 어떤 카나바로도, 지금 대장이 보고 있는, 이 누더기 조각을 걸친 조르바 영감이 그녀에게 해준 것만큼의 기쁨을 주지 못했죠. 왜냐고요? 그건 다른 카나바로들은 키스를 하면서도 함대며, 크레타며, 그들의 왕들, 훈장, 집에 놓고 온 마누라 따위를 생각하지만, 나 조르바는 모든 걸 잊고 키스만 하기 때문이죠. 그 계집도 그걸 잘 알고 있었죠. 그리고 나의 지극히 현명하신 분이시여, 여자들에게 이것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진정한 여자들은 남자들한테서 받는 기쁨보다는 자신들이 주는 기쁨을 더 행복하게 느낀다는 걸 아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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