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숙 고전평론가님의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영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을 글로 옮겼습니다.
제가 전국의 강의를 다니다 보면 고등학생이 이런 질문을 해요. 아주 건강하고 밝고 잘생긴 고등학생이 자기는 너무 우울하다는 거예요. 이유가, 꿈이 없다는 거예요. 꿈이 없는게 사실은 동양에서는 도의 극치거든요. 너는 도를 깨달았다. 동의보감에서도 꿈이 없는 잠이 가장 행복하다고 최고의 잠이거든요. 근데 꿈이 없는게 왜 이 밝고 건강한 10대를 이토록 좌절하게 할까. 그러니까 자신의 자의식 안에 꿈이라는 것을 새겨 넣어야만 자기가 살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또 하나 이제 20대 청년들하고 대화를 하다보면 잘 아시겠지만 청년이라기보다 이미 좀비적인 신체가 됐잖아요. 우리가 뭐 서로 알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질문을 해요. 어차피 죽을 건데 왜 살아야하는지 모르겠다고. 그게 저 같은 노년을 앞둔 어른한테 할 말은 아니죠. 기본적으로. 죽어도 내가 먼저 죽을 것 같은데. 그런 절망이 드는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어차피 죽을 건데 너무 서두를 건 없지 않냐. 그러니까 그 청년한테는 삶에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 이유는 목표, 의미, 가치 그리고 그것을 향해 달려가는 열정이 있어야 한다고 전제하는 거예요. 그런데 자기는 그게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없는 상태로도 충분하다는 걸 모르는 거죠. 믿지 않는거고. 그래서 제가 이 전체 주제에 좀 근원적으로 딴지를 거는 이런 질문을 던지게 됐습니다. 꿈과 의미, 가치가 삶에서 소중하다. 맞아요. 그런데 삶보다 더 소중할 순 없어요. 살다보니 꿈을 갖게 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나서 사랑을 하기도 하고 무엇을 이루고 싶다고 마음이 드는거지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사는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완전히 전도가 일어난거예요. 꿈이 있어야 되고, 무언가를 이루어야 된다. 가치가 있어야 된다. 내 존재의 이유는 가족이다. 이건 정말 거짓말이죠. 가족은 어떻게 보면 살고싶지 않게 만드는 원인이 아닐까요. 가족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많은 대중문화에서 얘기하는 널 만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왔다는 이 우주적인 뻥. 세상에 그게 가당합니까. 내가 왜 저 인간을 만나러 여기 태어납니까. 살다보니 우연히 만난거예요. 그리고 곧 크로스되서 각자의 길을 갈거예요. 그러니까 이런 망상, 판타지라고 하기에도 너무 비대해진 이런 망상속에서 자기 삶을 구성해야 되는 세대가 등장을 한거죠. 그래서 이 청춘이 던지는 질문을 전 세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요. 물론 저를 포함해서. 그래서 삶이 무엇인가. 이런걸 근원적으로 한 번 살펴보면 산다는 건 어느날 어떤 시간 공간에 던져지는 거에요. 내가 왜 지금 하필 여기에 오는가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걸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걸 알면 여길 안옵니다. 그걸 아는 존재는. 다 아는데 왜옵니까. 그리고 이건 너무너무 평등한거예요. 금수저건 흙수저건 엘리트건 평생 꼴지만 한 사람한테도 동일한 무지라는 생명의 토대. 모른다. 그래서 삶은 모른다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내가 왜 지금 여기 있는지 모르겠는데 삶이 시작이 되버린거예요. 만약에 그 의미를 찾아야 된다면 갓난아기들은 돌 전에 다 삶을 포기하지 않을까요. 걔들이 뭘 알겠어요. 왜 왔는지 왜 살아야되는지 알고 삽니까. 그래서 삶은 이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나긴 앎의 여정이다. 이렇게 정의할 수 있어요. 그래서 모든 존재는 태어나는 순간 이미 구도자가 되는거예요. 누구에게나 이 화두는 절박하고 절실하니까요. 그래서 인생이 뭐냐 내가 던져진 길, 주어진 길 위에서 나의 길을 찾아가는 여정. 이렇게 정의를 하면 일단 의미가 있어야돼 꿈이 있어야돼 이거는 굉장히 부차적인거죠. 그래서 삶이 이렇게 시작되기 때문에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다른 점이 세상 만사가 너무너무 궁금해요. 너무 알고 싶어해요. 알고 싶어서 미치는 거. 이게 인간의 존재성이예요. 왜냐면 태어날 때 질문을 할 수 있었는데 완벽한 무지에서 시작하는거예요.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모든 것을 알고싶다고 하는 지식의 여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갓난애기서부터 성장기 청춘 중년 장년 노년까지 삶을 이끌어가는 건 질문인거죠. 질문. 질문이 없어지는 순간 나는 좀비가 되는거예요. 그건 청년이든 노년이든 똑같아요. 청년은 좀비가 되고 노년은 꼰대가 되는거죠. 똑같은 대답을 반복합니다. 반복은 생명과 완전히 반대되요. 반복은 반생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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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존재해야하지, 삶의 목적과 가치가 뭐지, 어떻게 살아야되지에 대한 질문은 여기에 대한 자연의 응답은 간단합니다. 삶은 삶 그 자체로서 충분해요. 다른 의미를 거기에 덧보탤필요가 없어요. 그래서 사실 우리가 태어나서 뭘 갖고 싶고 의미를 부여하고 열정을 가지고 뭘 합니다. 그런데 봄, 여름까지 그렇게 하는거고 가을과 겨울이 되면 이것들을 하나씩 덜어내는 거예요. 그래서 가장 완전한 죽음, 아름다운 죽음은 삶에 어떠한 회한도 없고 바라는게 없는 상태, 그냥 이 죽음 자체로 충분한거죠. 이것이 바로 지혜의 인드라망입니다. 그러니까 필요없는거예요.
... (중략)
그러기 위해서는 삶에는 삶 그 자체 말고 다른 가치와 의미가 필요없다는 이 앎. 이 앎과 접속을 해야죠. 이 앎은 침묵과 무, 영성의 세계이기 때문에 지평선 같은 거예요. 이 지평선은 우리가 보고 달려갈 수 있지만 도달하지 못하는 거예요. 도달할 필요도 없고요. 그래서 끝없이 인간이 묻고 또 묻고 물으면서 한 걸음씩 갈 수 있는 그 길이 앎의 지평선이라고 생각하고. 그 지평선에 접속할 때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혜라고 하는 이 우주의 파동과 마주치는 지점이 아닐까. 그래서 제가 좀 어설프게 이렇게 말씀드렸지만 이제 정말 역설적으로 근원적인 질문을 던져서 이 앎의 지평선을 향해 달려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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