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인 조르바
알렉시스 조르바의 삶과 행적
니코스 카잔자키스 지음 / 유재원 옮김 / 문학과지성사 펴냄
- P505
- 여명의 부드러운 빛이 드리워질 무렵 나는 깨어나 바닷가를 따라 잰걸음으로 마을로 향했다. 내 마음은 나는 듯 가뿐했다. 내 생애 이런 기쁨은 거의 맛본 적이 없었다. 기쁨이라기보다 숭고하면서도 설명할 수 없고 정당화할 수도 없는 열정이었다. 단순히 정당화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정당화할 수 있는 모든 것들에 대한 반항이었다. 나는 모든 돈을 잃었다. 인부들도, 케이블도, 짐수레도 다 잃었다. 화물 수송을 위해 조그만 항만까지 만들었는데 이젠 수송할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모든 것을 다 잃었다. 하지만 지금 나는 전혀 예기치 않았던 자유를 느끼고 있다. 마치 무뚝뚝한 필요의 여신의 딱딱한 두개골 안 좁은 구석에서 자유의 여신이 놀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그 여신과 함께 놀고 있다.
- P520
- 조르바가 머리를 저었다. "아뇨, 대장! 대장은 자유롭지 않수다. 대장이 매여 있는 줄은 다른 사람들 것보다 조금 길기는 하지만 그뿐이오. 대장, 대장은 조금 긴 끈을 갖고 있어 왔다 갔다 하면서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끈을 잘라내지는 못했수다. 만약 그 끈을 잘라내지 못하면 ..." "어느 날엔가는 그 끈을 잘라낼 거예요." 내가 고집스럽게 말했다. 왜냐하면 조르바의 말들이 아직 아물지 않은 내 상처를 건드려 아팠기 때문이다. "대장, 그건 어렵수다. 아주 어려워요. 그러려면 미쳐야 하는데, 듣고 있수? 미쳐야 한단 말요. 모든 걸 걸어야 해요! 하지만 대장, 당신은 머리가 있어 그게 대장을 갉아먹고 있죠. 정신이란 식품점 주인 같은 거요. 장부를 팔에 끼고서는 얼마 들어왔고 얼마 나갔고, 이건 이득이고 저건 손해고, 일일이 기입하죠. 정신은 알뜰한 주부 같아서 모든걸 포기하지 못해요. 뭔가 하나는 꼭 숨겨놓죠. 정신이라는 놈은 결코 끈을 놓지 않아요. 절대로! 그 악당은 손아귀에 그 끈을 꽉 쥐고 있답니다. 그 끈을 놓치면 그놈은 망하는 거니까요. 불쌍하게도 사라지는 거죠! 하지만 그 끈을 자르지 않으면, 대장, 인생에 뭐가 있겠수? 캐모마일 차, 맛있는 캐모마일 차 정도? 세상을 뒤집어엎을 럼주는 절대 아니죠." 그가 말을 멈추고는 다시 술을 따랐다. 하지만 곧 마음을 바꿨다. "대장, 날 용서하슈, 난 시골 촌뜨기요. 진흙이 발에 들어붙어있듯 말들이 이빨에 붙어 있수다. 난 말을 멋있게 하지도 예의 바르게 하지도 못하우. 그렇게 할 수 없수다. 그러니 대장이 이해하슈." 그는 잔을 비우고 나를 바라보았다. "아시겠소?" 마치 갑자기 분노가 터져 나온 것처럼 그가 소리쳤다. "아시겠냐고요? 이게 바로 대장을 잡아먹고 있수다. 그걸 모르면 대장은 행복할 거요. 뭐 부족한 게 있수? 젊겠다. 돈도 있겠다. 머리도 좋겠다. 몸도 튼튼하고, 사람 좋고, 대장한텐 부족한게 하나도 없수다. 아무것도 아쉬운 게 없지. 빌어먹을 악마 놈! 딱 한 개만 빼고 말이우. 미친 짓을 벌이는 광기 말요. 광기가 없으면, 대장..." 그는 다시 머리를 젓고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나는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조르바의 말은 모두 옳았다. 아직 어렸을 때, 내게는 인간이 되기 이전 시절 야수의 욕망과 열정이 넘쳤었다. 나는 홀로 앉아 세상이 나를 다 받아들일 수 없음을 한탄하며 한숨을 쉬곤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더 이성적이 되어갔다. 경계선을 긋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을,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구분하고 종이 연이 날아가지 않도록 꼭 쥐었다. 커다란 별똥별이 하늘에 긴 고랑을 내며 사라졌다. 조르바가 뛰어 일어나 사라져가는 별똥별을 마치 처음 보는 사람처럼 큰 눈망울을 굴리며 바라보았다.
'인생문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프란츠 카프카 (0) | 2023.09.25 |
---|---|
[고미숙 고전평론가] 삶에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 영상 中 (4) | 2023.08.30 |
글자보단 경험을 추구하는 삶을 살기를 (5) | 2023.08.26 |
욕망을 다루는 법 (0) | 2023.08.22 |
인간의 영혼만이 남아 노래하고 있었다. (0) | 2023.08.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