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원래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려고 했었다.
아니 가야한다고 생각했엇다.
그래서 회사와의 계약이 끝나는 시점에 맞추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려 했다.
맨 몸으로 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필요한 물품들도 하나씩 사서 모으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이자 삶의 재미였다.
그런데 해파랑길을 걷고 있는 지금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생각들이 바뀌고 있다.
어떤 생각의 흐름을 거쳐 나의 판단이 바뀌게 되었는지 정리해보려 한다.
1. 왜 걸으려 했는가?
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왜 걸으려 했을까.
삶에 대한 확신을 갖고 싶기 때문이었다.
내가 어디로 가야하는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알고 싶었다.
그런데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깨달았다.
걷는다고 해서 내가 무엇을 해야할지는 알 수 없다.
다양한 일을 시도해보는 것이 더 도움이 될 것이다.
2. 그런데 알지 않았나? 걷는다고 해서 답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을
맞다.
알고는 있었다.
걷는다고 해서 삶의 정답을 알 수는 없다는 것을.
더욱 깊은 본질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통해 진정한 나와 만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야만 한다고 생각했었다.
왜일까.
사람들이 자주 언급하기 때문이었다.
3. 또 다시 도진 인정욕구
’저, 산티아고 순례길 가봤어요.‘
사실 이 말이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면 상대방이 나를 좀 더 근사하게 바라봐 줄 것 같았다.
나를 마치 깨달은 사람으로 봐 줄 것 같았다.
그러면 이건 도대체 누굴 위한 산티아고 순례길인 걸까.
결국엔 다른 사람에게 인정받기 위해서 가는 여정이 아닐까.
중요한 것은 인정욕구를 끊어내고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에서 시작해서 꼭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어야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4. 무엇을 할지는 정해져 있지 않은가. 그러면 그걸 열심히 해야지
나에겐 아노미 자아가 있다.
이 녀석은 이런 말들을 끊임없이 한다.
‘도대체 아무것도 모르겠어.’
‘내 안은 지금 무정부상태이니 앞으로 어떻게 할 지 고민해야만 해.’
‘내가 나아가야 할 방향이 어디인지 모르겠어.’
이런 말을 들으면 난 금세 이끌린다.
아노미 자아는 나를 가장 강한 인력으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나의 삶이 통째로 끌려간다.
그런데 아노미 자아가 활개치기 전에 이성적 자아는 말해주고 있었다.
나의 길은 개발과 글쓰기라고.
이 둘을 추구하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만약 여건이 된다면 아이를 낳아 함께 키우며 더욱 행복하게 살라고.
그렇다.
나는 사실 무엇을 해야할 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 노력해야할 때가 바로 지금인것이다.
그런데 아노미 자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겨 삶이 갑자기 도랑에 빠져버렸다.
이렇게 휘둘린 건 예전부터도 지긋지긋하게 있어왔지만 이제는 한계다.
끊어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선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지 않는 것이 맞다.
5. 그러면 지금까지 준비하던 건 무용지물인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가겠다는 목표하에 생각하고 움직이며 얻은 값진 부분들도 있다.
가장 값진 부분은 러닝이다.
체력을 올리기 위해 시작했던 러닝 덕분에 하루를 버텨낼 힘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러닝은 앞으로도 계속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백패킹 경험이다.
내가 언제 살면서 야외에서 혼자텐트를 치고 잠을 자보겠나.
내가 언제 살면서 배낭을 메고 등산을 할 생각을 할까.
이걸보면 인생에서 중요한 경험을 한 셈이다.
사서 모아둔 캠핑 용품은 앞으로도 쓰면 되니 너무 아까워하지 말자.
이번 해파랑길처럼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찍어서 야영하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다만 새벽에 추워질 건 꼭 고려하자.
멀리가기 어려우면 여의도 한강쪽으로 나가서 하루 텐트치고 자도 좋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는 내가 추구하는 부분에 더 집중해야겠다는 마음을 얻게 된 것이다.
지금에서야 다시 느끼지만 나는 개발과 글쓰기가 인생의 두 축이자 정체성인 사람이다.
더 이상 찾고말고 할 것도 없다.
본능과 무의식이 맞다고 말하면 맞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을 더 찾으려 하는 일도 이번으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 또한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집중과 열정의 가치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6. 그러면 앞으로 어떻게 할건데.
이번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깨달은 점이 있다.
바로 여행을 갈 때와 올 때의 나는 다르다는 것이다.
지금의 나만 보아도 그렇다.
해파랑길을 걸어보고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생각을 바꾸지 않았는가.
그래서 여행의 경험은 지금의 나에게 꼭 필요하다.
좀 더 다듬어야겠지만 내가 가보고 싶었던 두 곳에서 오래 지내볼 생각이다.
바로 바르셀로나와 아를이다.
바르셀로나는 도시가 너무나 아름다워서 가보고 싶고 아를은 내가 고흐를 좋아하기 때문에 가보고 싶다.
이 두 장소에서 오래 머무르는 일정으로 여행을 가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여행을 다녀와서는 다시 개발자로 일을 시작하고 틈틈히 글을 써서 에세이도 낼 계획이다.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기를 바라며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 것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정리되어 가지 않기로 했다.
다만 여행은 앞으로 죽는 날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싶다.
경험을 쌓는 것만큼 사람에게 중요한 가치는 없다는 것을 해파랑길을 걸으면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제는 그만 방황하고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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